Real 마계 탐방기 5부 - 블루밍데일 -
들어가기에 앞서, 본 글은 지난 글의 후속작임을 미리 밝힙니다. 이전 글을 읽으시면 내용을 이해하시기 더 순조로우므로 아무쪼록 둘러봐주시길 바랍니다.
※ 스포일러에 해당하는 서술이 일부 있으므로 이하 내용은 '시간의 문' 구간의 시나리오를 모두 완료한 분만 읽으시길 권장합니다.
또각또각.
먼지로 뒤덮여 바닥이 보이지 않는 한적한 복도 위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불빛이라고는 양 벽에 5m 간격으로 걸린 촛불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희미하여 폐허에 가까운 건물 내부에서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주진 못했다.
누군가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곳에서 여자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도 설렜다. 몹시 두근거려서 좀체 진정하는 법이 없었다. 여인은 두려워하기보다 기쁨에 겨워 이 순간만큼은 주위의 모든 사물을 사랑할 수 있었다.
순전히 마법으로 타오르는 작고도 영롱한 불꽃에 매료되어 두 볼이 발그레 물들기 시작했다. 은은한 빛을 뿜어대는 촛대를 바라보며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저 문만 열면 ‘그 분’과 만날 수 있어서였다.
혹독한 마계의 유일무이한 구세주이자 빛—
이처럼 존귀한 분을 홀로 대면할 수 있다니—
마치 주인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손에 들고 있던 우쿨렐레가 멋대로 노래를 부르려했다. 화들짝 놀란 여자가 황급히 우쿨렐레를 조심스레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독였다.
“지금은 안 돼, 마레리트. 너도 알잖니? 그 분 앞에서 혹여나 결례를 범한다면 난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할 거야.”
말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이내 잠잠해진 우쿨렐레에 여인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곧이어 일어날 일을 떠올리며 흥분을 못 이긴 손가락이 마레리트의 현을 살포시 건드린 거였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오늘 하루는 완벽해야 했다. 미천한 자신이 고귀한 존재의 은밀한 부름을 받았으니 거기에 맞춰 최대한 부응해야만 했다.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되었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여인은 가벼이 침을 꼴깍 삼켰다. 문을 열자마자 모습을 드러낼 우아한 자태에 행여 눈이 멀지는 않을까 따위의 쓸데없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대신 거룩한 그 분의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귀를 쫑긋 세우고자 마음먹었다.
쇠고리를 가뿐히 당겨 스르륵 열린 문 안에서 여인은 일순간 숨이 멎었다. 몸집의 갑절은 훨씬 넘는 큼지막한 로브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마계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그 분께서 지금 자신의 앞에 서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아아, 힐더 님.”
“잘 찾아왔군요. 아이리스.”
어깨는 물론이고 머리까지 둘러싼 칠흑의 로브가 어슴푸레한 불빛에 반사되어 오묘한 빛깔을 자아냈다. 푸른빛이 감도는 하얀 머리칼은 깨진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미세한 바람에 의해 하늘하늘거리고 있었다. 단순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장악하는 고상한 매무새에 아이리스는 속으로 매번 감탄해마지 않았다.
“부탁드렸던 대로 해주었겠죠?”
“예. 오늘 만남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저 혼자 왔습니다. 미행도 없었고요.”
"다행이군요. 알다시피 저는 누굴 함부로 만나거나 할 수 없는 입장인지라…."
"아닙니다, 힐더 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힐더 님이시니까요."
옅은 눈웃음과 잔잔한 미소가 긴장했던 여인의 마음을 천천히 녹여주었다. 귓가에 똑똑히 들리는 자애로운 목소리도 이에 한몫했다.
얼마나 많은 마계인이 그녀의 말에 구원을 얻고 안식을 찾았던가.
과거의 일들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헤아릴 수 없는 존재감이 아이리스를 엄습해왔다. 그럼에도 아이리스는 의연한 자세로 멀쩡히 두 다리를 지면으로부터 세울 수 있었다.
마계에서 힐더의 부름을 개인적으로 받은 인물은 사도를 제외하면, 마계인 중에서 사상 최초. 이것만으로도 그녀와 당당히 두 눈을 마주할 자격이 있는 셈이었다.
적어도 아이리스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해해주어서 고마워요. 짐작했겠지만 오늘 제가 당신과 나누려는 이야기는 우리 외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입니다.”
아이리스는 ‘우리’라는 단어에 하마터면 들고 있던 마레리트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리고 ‘비밀’이라는 속삭임에 마구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여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세요. 이 아이리스, 절대 힐더 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후후, 역시 그렇게 말해주리라 예상했어요. 그저 말뿐이라 해도 참 든든하군요.”
허풍이 아니라고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둘 사이에 느닷없는 입체 영상이 거짓말처럼 번쩍 하고 나타났다. 전부터 그 자리에 쭉 있던 것만 같은 홀로그램이 무언가를 비추고 있었다. 가녀린 손에 쥔 지팡이를 고작 한 번 바닥에 찍었을 뿐, 주문을 읊조리지도 않았다. 삼지창(trident)과 흡사하게 생겼으나 양 끝이 완만하게 구부러진 지팡이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마력이 넘쳤다.
“힐더 님. 이, 이건 대체…?”
“평온하고 아름답지 않나요? 이곳 마계와는 달리, 따뜻한 햇살이 가득하고 생명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 세계. 듣던 바로는 ‘아라드’라고 하더군요.”
아라드…?
마계와는 판이한 세계? 어쩌면 아예 다른 차원에 있는 세계일지도 몰라.
아이리스는 힐더가 품고 있는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파악하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아무런 의도 없이 이런 영상을 보여줄 리는 없을 터였다.
마계에는 있을 리 만무한 태양이 온 대지를 보살피며, 온 마을에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어디 그뿐이랴. 대지 사이로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이 넓은 대양으로 흘러들어 또 다른 삶을 잉태한다. 그 위로는 고래 같은 거대한 생명체가 하늘을 유유히 배회하며 모두를 황혼으로 인도한다.
이를 보고도 아무 감흥이 없는 마법사가 과연 있을까. 일련의 꿈만 같은 장면이 아이리스의 호기심을 자아내고도 남았다. 새로운 마법을 터득할 적마다 접했던 경이로움을 아득히 뛰어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정말, 아주 아름답습니다. 이런 세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힐더 님께서 보여주지 않으셨다면 비천한 저로서는 구경도 못했을 세계에요.”
“그래요. 이토록 멋진 세계를 무너뜨려야 한다니 마음이 아프답니다.”
“네?”
“잘 들으세요, 아이리스. 저 외에 다른 사도들을 아라드 저 너머로 유폐시킬 계획에 당신이 필요합니다. 암적 존재였던 그들을 이 이상 함께 안고 가기에는 고통 받을 이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그러니 마계에 진정한 평화를 되찾아주려면 안타까운 희생쯤이야 기꺼이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 들은 것일까. 아이리스는 수차례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분명 무엇인가 중요한 화제를 놓쳐서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니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녀가 입 밖에 내는 소리는 지금껏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죄다 머릿속에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아이리스가 사도 힐더의 열렬한 신봉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제가 듣기에 거북한 소리라도 했던가요?”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눈동자에 아이리스는 그만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때 아닌 오한이라도 든 듯 안절부절 못하는 티가 날 뻔했으나 가까스로 견뎌냈다.
힐더가 이상한 게 아니다. 안부를 묻는 그녀는 어조부터 모든 게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정상이 아닌 건 자기 자신이라고 되뇌며, 아이리스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힐더 님. 머릿속으로 힘닿는 데까지 이해해보고자 하였으나 도저히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잠시 당황했을 뿐입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그러자 가냘프고도 고운 손이 아이리스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었다. 진심으로 안쓰러웠는지 힐더가 얼굴에서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오, 아이리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나 보군요.”
“아니에요. 힐더 님. 그건 아니에요. 다만 아라드라는 곳에 힐더 님을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을 보낸다니, 우선 그게 일단 실현 가능한 일인지조차…”
“가능해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하면서 힐더는 아이리스의 이마로부터 사뿐히 손을 뗐다. 앞일을 염려하며 머뭇거리는 여인을 달래고자, 곧장 자상한 미소로 말을 건넸다.
“아이리스,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세요.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당신의 뒤에는 항상 제가 있을 테니까요.”
어찌 이리도 다정다감하신 분일까, 라고 아이리스는 안심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정이 넘쳐흐르는 격려로 힘을 북돋아주려고 한다. 그 말을 그대로 따른다면 마음이 이렇게까지 심란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불안을 도무지 떨쳐내지 못했다. 방금 전, 홀로그램 속 아라드를 보며—
‘이토록 멋진 세계를 무너뜨려야 한다니 마음이 아프답니다.’
눈 깜짝할 사이긴 했어도 이 때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지극히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이 여태껏 알고 있었던 힐더라면 결코 보여서는 안 되었을 간악한 웃음, 그것은 실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확인해야만 했다. 어디까지나 착각이었음을 순순히 인정할 수 있어야 그녀를 향한 오해를 막을 수 있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힐더 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뭔가요? 아이리스.”
우쿨렐레를 붙잡은 손에 전보다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 같은 변화를 유심히 내려다보며 힐더는 지팡이에 얹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움직였다.
“아라드에 사도를 보낸다는 말씀이 솔직히 저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곳과는 다른 세계, 혹은 다른 차원으로 유폐시킨다고 하셨으나 어째서 그 장소가 아라드여야 하죠? 제게 보여주셨듯이 아라드라는 곳은 여러 동식물이 살아 숨쉬는, 마치 꼭 꿈만 같은 낙원입니다. 여기에 사도, 예를 들어 이름을 언급하기에도 끔찍한 질병의 디레지에를 전송시켰을 경우…”
“그의 숨결에 닿은 생명체는 모조리 녹아내리거나 산송장이 되어 구천을 떠돌겠죠.”
“그럴 줄 빤히 아시면서 왜…”
“왜냐니? 마계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명석한 당신이라면 제 뜻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줄곧 보여주었던 상냥함은 신기루처럼 아스러지고, 근엄한 낯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단번에 냉랭한 분위기로 돌변한 방은 이후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해주는 듯했다.
“힐더 님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내다보시는지 일개 점술가인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만큼 힐더 님의 운명은 저 같은 한낱 미물이 점치기에는 그릇의 크기가 다르니까요. 하지만 아라드가 아니라 아무 생명체가 없는 곳으로 보내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예견된 비극이라면 우리가…”
“확실히 당신 말이 맞군요.”
그래요, 힐더 님.
생각을 바꾸시면 반드시 더 나은 방안이 있을—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아이리스, 당신과 나의 그릇 크기겠지요. 다소의 안타까운 희생이야 어쩔 수 없다고 말했음에도 내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당신은 그것뿐인 존재입니다.”
“… 예?”
“그래도 당신의 마력과 재능은 날 위해 쓰일 가치가 있어요. 답답하면서도 애처롭군요. 얌전히 내 말을 따랐다면 좋았을 것이거늘.”
눈과 입 가장자리에 비수보다 더 날카로운 쓴웃음을 피워 내며 힐더의 손아귀에 막강한 마력이 응어리졌다. 검붉고 탁한 구체가 뒤엉키다시피 하며 께름칙한 비명을 질러대는 것만 같았다.
위험하다고 인지하기도 전에 그것은 화살처럼 아이리스의 이마를 꿰뚫고 지나갔다.
아아—
힐더 님, 어째서—
이윽고 뇌리를 파고드는 저주가 스멀스멀 아이리스에게 속삭였다. 아라드의 온갖 곳에서 차마 입 밖에 꺼낼 수조차 없는 악행을 저지르는 자기 자신 — 힐더가 부여해준 제2의 자아.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비참함이 온몸에 사무친 여인은 가엾게도 본래의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다.
도와주세요.
제발…
누가 저 좀 도와주세요.
아니오. 이러지 않았을까 멋대로 추측한 글이니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크나큰 사건이 연달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아라드.
일련의 사건 속에 휘말린 모험가는 그 원인 중 하나로 '전이' 현상을 알게 됩니다. 평화로웠던 아라드를 혼돈의 도가니로 빠뜨린 '검은 악몽'처럼 누군가의 음모로 일어난 전이는 많은 이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죠. 전이를 통해 이세계에서 아라드로 온 막강한 존재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전이는 매우 고난이도 마법이라 행할 수 있는 자가 극히 드물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악행을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저지하려는 모험가에게 피해자랍시고 충고까지 해줍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동정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노력이 언제나 용납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정당방위라기에는 그들이 아라드에 끼친 영향력이 너무나도 컸고, 가만히 두었다가는 아라드가 죽음의 땅으로 변했을 겁니다.
그러기에 과거의 모험가들은 사도 시로코를 쓰러뜨려야만 했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 의지를 이어 사도 로터스와 사도 안톤을 소멸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사도 디레지에는 모험가가 아닌 제3자가 만든 차원의 틈에 휩쓸린 거라 예외). 그렇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전이를 비롯하여 여러 사태로 아라드를 쥐락펴락했던 누군가가 있다, 라고 의문을 품었던 웨펀마스터 ― 시란이 없었다면 모든 비극의 배후에 숨어있던 책략가를 무대 안으로 끌어내기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시란과 함께 시간의 문을 탐험한 아라드의 모험가라면 한 번쯤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어봄직합니다. 모험의 끝은 정녕 어디인가?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내 운명을 가로막는 끝판왕이자 최종 보스는 과연 누구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써 저번 시간에 다룬 '제1사도 카인' 외에 다른 사도를 떠올릴 모험가도 생각보다 꽤 있으리라 예상합니다. 아시다시피 카인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지녔지만, 사도 바칼처럼 성격이 난폭하다거나 자신의 영역 외에 다른 곳을 노리는 야욕가도 아닌 탓입니다. 즉,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피차 피곤한 일 없는 셈이니 모험가로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죠. 어떻게 해서든 카인 레이드가 먼 미래에 나올 거 같긴 하지만, 그 문제는 일단 논외(…)로 둡시다.
그렇다면 모험가로서 이겨내야 할 최종 난관은 어떤 인물이 장식해야 자연스러울까요? 우리의 여정을 담아낸 시나리오가 느닷없이 엎어지지 않는 한, 현 시점에서 그 자리를 차지할 원흉은 단 한 명 ― 제2사도 힐더입니다.
마계에서 창신세기를 발견한 후부터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힐더
힐더를 둘러싼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마계인에게 사랑받는 사도라는 사실. 아라드 곳곳을 뒤흔들기 시작한 '궁극적인 원인 제공자'인 것과는 너무나 대조되는데요. 건설자 루크처럼 마계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도로서 마계를 위해 여러 모로 공헌한 바가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계의 영광을 되찾고자 오랜 기간 힘써왔다는 설명에 주목하자
두 세계를 놓고서 힐더가 보였던 상반된 입장을 아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주도면밀한 성격이라 모든 일에 직접 나서지 않고, 자신의 뜻을 대신할 '꼭두각시'를 쓰는 등 흔적을 남기지 않았죠. 또 하나 경악할 만한 사실은 예상 외의 변수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자신의 손아귀 안에 두고 있는 듯한 여유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타임 리프(time leap) 능력을 얻게 된 시란이 허를 찌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계획이 중단되었던가요? 우리는 좋든 싫든 힐더가 원하는 대로 사도 루크를 없애는 데에 일조하고 말았던 지난날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기 어렵습니다만, 힐더는 이제 모험가라는 집단을 관심밖에 둔 듯싶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꿍꿍이를 눈치챘다고 하더라도 미칠 영향이 지극히 미미하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또 한 번 알게 모르게 그녀의 모략에 협조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저 너머에…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는 현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자세로 임하는 것뿐. 아라드에서 해왔듯이 마계에서도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최대한 사도에 관한 정보를 모아갈 때, 우리는 더 이상 힐더의 장기말이 아니라 강력한 맞수로 떠오를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소개할 Real 마계의 블루밍데일(bloomingdales)도 어쩌면 이에 일맥상통할 소소한 자료로 기능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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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섬에만 여기 말고 점포가 두 군데 더 있다
시간의 광장, 센트럴 파크, 할렘, 그리고 유니언 스퀘어처럼 블루밍데일이라는 지명 역시 뉴욕에서 유래했음을 쉽사리 추측할 수 있습니다. 블루밍데일이란 명칭이 미국 여러 도시의 실제 지명으로 쓰이기도 하나,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묻는다면 유명 백화점 체인을 가장 먼저 생각해낼 테니까요. 그것도 뉴욕에서 태동한 역사적인 백화점을! ☞ 공식 홈페이지
본점이라 부를 만한 뉴욕 59번가 블루밍데일
오늘날의 블루밍데일을 만든 시초는 19세기 사람인 블루밍데일 형제- Joseph & Lyman Bloomingdale -입니다. 당시 뉴욕의 패션 상점은 매장에서 한 가지 상품만 취급하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스카프 상점이라면 색깔이나 재질이 다른 스카프만 줄곧 팔았다는 뜻이죠. 그러던 중 1872년, 블루밍데일 형제는 새로 개장한 뉴욕 동부 매장에서 놀라운 혁신을 선보입니다. 상점마다 상품 1종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파리에서 직접 공수한 여러 종류의 유러피안 패션 아이템을 매장에 진열하기 시작한 겁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백화점'의 형태를 갖추게 된 셈입니다.
남들과는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한 블루밍데일은 20세기에 들어 엄청난 확장세를 이룹니다. 20세기 초에는 광고판, 배달 차량, 심지어 여성용 해변 우산 등 어디에 있든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쳐 사람을 모았고, 20세기 중반에 다다라서는 다른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경쟁사 매장도 마찬가지로 손님 확보에 주력하고 있었기에 프린트 광고만으로는 역부족이어서 홍보 방향을 전환해야만 했죠. 이 시점에서 블루밍데일이 고안한 해결책은 크게 2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옛날 한겨울의 블루밍데일. 중앙 상단 벽면의 로고가 인상 깊다.
첫째, 블루밍데일은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공간에서 일찌감치 탈피했습니다. "Woman Of The Year, 1947."과 같은 이벤트 개최장소로서 매장을 활용하는 식으로 손님에게 이색적인 즐길거리를 선사했습니다. 지금에야 백화점에서 손님 유치 목적으로 기획된 이벤트를 진행하는 일이 흔하지만, 과거에는 생소했던 개념이어서 많은 이의 입소문을 타는 데에 성공합니다. 백화점의 용도를 한 단계 진화시킨 전략이었죠.
둘째, 손님을, 손님에 의한, 손님을 위한 브랜드 상품을 적절히 이용했다는 점입니다. 쇼핑을 하러 온 고객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편의점에서 무언가를 구매하면 편하게 들고 갈 비닐봉지가 필요하듯이, 해답은 백(bag) 속에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원하는 물건을 고른 후 매장 밖을 나가는 손님은 필히 쇼핑가방을 손에 들게 됩니다. 블루밍데일은 이를 포착하여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대변하는 갈색 가방(brown bag)을 만든 후, 손님이 쇼핑가방으로 쓰도록 유도합니다. 이 가방에는 당연히 블루밍데일의 로고가 새겨져 있긴 하나, 그저 그런 쇼핑백과는 약간 출생 배경이 다릅니다. 누가 봐도 새련되게 보이게끔 1960년대부터 유명 디자이너나 미술가에게 쇼핑가방의 디자인을 맡기기까지 했거든요. 그 결과, 블루밍데일의 쇼핑백을 수집하는 마니아까지 등장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긴 쇼핑가방을 들고 다닌다면 블루밍데일 고객이라는 증거
이후에도 블루밍데일은 성장세를 멈추지 않습니다. 1970년대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매장에 찾아오는가 하면 랄프 로렌, 페리 엘리스, 노마 카말리 등 아주 저명한 패션 디자이너들의 무대로 발돋움하기도 했죠. 서서히 뉴욕을 벗어나 캘리포니아, 뉴저지, 플로리다, 조지아, 뉴 햄프셔, 일리노이, 펜실베이니아, 텍사스, 버지니아, 메사추세츠, 메릴랜드, 심지어 하와이까지 미국 각지에 점포를 세우며 명실상부한 백화점으로 나날이 거듭나고 있습니다. 이런 내력이 있는 까닭에 쇼퍼홀릭 사이에서 블루밍데일이 심심찮게 거론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답니다.
쓸만한 지식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자, 그러면 이쯤해서 여러분께 블루밍데일의 발자취를 주구장창 말씀드린 이유를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서 웬 뜬금없는 백화점 역사 공부에 어리둥절하신 분도 있으실 테니까요.
힐더의 거주지로 설정된 블루밍데일을 실제 다녀온 소감은 소박하기 그지 없습니다. "여기 그냥 백화점인데?" 이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었거든요. 백화점을 갔으니 응당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지사이건만, 좀처럼 실망감을 떨쳐내기란 힘들었습니다.
뉴욕을 대표하는 쇼핑몰 중 하나이기에 우아하며 깔끔한 분위기를 제대로 만끽하기에는 딱입니다. 백화점의 표본이자 롤모델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장소라는 점도 인정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블루밍데일은 뉴욕을 소개하는 가이드북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무척 잘 나가는 백화점입니다.
다만, 블루밍데일이란 이름만 보고 이곳을 찾은 모험가에겐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을 듯싶습니다. 명품 쇼핑이 취미인 독자인 경우 지름신이 강림할 수는 있겠으나, 사도 힐더를 회상하기에는 과히 지나칠 만큼 휘황스레 찬란한 장소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힐더의 이미지는 화려하게 번쩍번쩍 빛나는 태양이 아닌, 암암리에 모략을 꾀하는 어두운 그림자와 흡사하니까요.
그래서 블루밍데일의 현재가 아닌 과거 쪽으로 눈을 돌려 보았습니다. 끊임없는 개발과 유럽의 이민자로 들끊었던 19세기 뉴욕에서 쇄신에 쇄신을 거듭한 블루밍데일의 변천사는 어쩌면 ― 희망이라고는 죄다 사라진 척박한 마계에서 부흥을 갈망하는 그녀의 모습과 견줄 수 있지 않을까요? 인지도와 더불어 혁신과 변혁의 발상지로서 블루밍데일이란 이름이 힐더와 어울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한 혁신과 변혁이 모험가에게 곧 고난과 절망으로 다가온다는 게 치명적인 문제지만….
마계를 방랑하는 어리석은 자에게
찾아온 일말의 구원은
뜻밖의 장소에서 나타난다?
사도 카시야스와 인연이 깊은 그곳은 과연…?
다음 시간에 계속!
Real 마계 탐방기 - 1부 개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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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 마계 탐방기 - 2부 미개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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