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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게임/던파

호감과 친밀, 그 야릇한 경계에 관하여

by 지구여행가 2019. 11. 11.

우리의 삶의 터전인 아라드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영역에서 매일 변함없이 굳건히 서서 때때로 우리의 모험을 도와주는 이들. 이를 가리켜 우리는 흔히 NPC라고 부르지요. 아라드뿐만 아니라 천계나 마계 등 모험가라면 갈 수 있는 곳 어디든 있을 존재이기도 합니다.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365일 늘 우리를 기다리는 그들. 그런데 숱하게 모험을 하다 보면 어째서인지 개중에 더 정이 가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특정 NPC와 자주 보고 싶다거나 더욱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고 무심코 바랐던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 디스이즈게임


NPC와 각별해지기를 원하는 모험가가 한둘이 아니었기에 호감도 시스템이 뿌리를 내린 것도 꽤 오래전 일입니다. 정확한 기원을 따지자면 2009년 4월 23일 시행된 시즌2 ACT3 외전. <저를 기억해주세요> 업데이트죠. 현재와 같은 체계로 거듭나게 된 것은 2016년 1월 이후인데 선물을 건네주어 호감도 수치를 올린다는 기본 골자는 과거와 동일합니다. 

사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서 호감도 시스템의 작동 원리라거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가 설마 있으리라 내다보지는 않습니다. 제법 오랜 기간 굳어진 시스템 중 하나이거니와 모험가라면 가슴 한구석에 최애캐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제 막 아라드에 첫발을 디딘 초보 모험가라거나, 아예 NPC에 별 관심을 두지 않으며 고독함을 즐긴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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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시점에서 호감도 이야기를 왜 꺼냈을까요?

 


이유는 극히 단순합니다. 호감도 시스템이 개편된 2016년 1월부터 지금까지 쭉 이해하기 어려웠던 구분 ― 동성끼리는 호감만 느끼되 결코 친밀한 관계가 불가하다는 한계점이 전혀 개선된 바가 없어서입니다. 한동안 선물을 주지 않아도 호감도 수치가 하락하지 않는다거나 호감 순으로 NPC를 한데 모아서 볼 수 있는 인물사전 업데이트 등, 호감도 관련 업데이트가 최근 들어 무소식이었던 것도 아닌 터라 아쉬움이 조금씩 커져만 가고 있는데요. 개발팀 내에서 이를 크게 문제로 보고 있지는 않은 모양인지라 이달의 글 소재로 다뤄보고자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개선이 필요한 문제일 수 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현시점의 호감도 시스템은 보통(기본), 호감, 친밀과 같이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호감 단계부터 기본 대사가 변하기 시작하다가 친밀 단계에 이르면 독특한 보상을 누리게 됩니다. NPC가 착용 중인 의상을 염색할 수 있고, 그러한 NPC가 데릴라 대신 던전에 깜짝 등장하는 식이죠. 향후 친밀 단계 달성 혜택이 더 늘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바, 날이 갈수록 호감과 친밀의 격차는 지금보다 더 커질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가운데 현실의 성별과 게임 내 성별의 차이가 불러오는 괴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실제 성별이 남성인 유저 A는 여성 거너를 좋아하며 해당 캐릭터의 갖가지 스킬을 노련하게 구사할 줄 아는 실력자입니다. 한편, 그는 NPC 중에서 천계 겐트의 수비대장인 젤딘 슈나이더를 가장 아낍니다. 그래서 자신이 즐겨 플레이하는 여성 거너를 통해 젤딘 슈나이더에게 매일 꼬박꼬박 선물을 주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더 나아가 이러한 예도 있겠지요. 여성 유저 B는 마창사를 무척 아끼기에 신상 아바타는 무조건 사주는 열렬한 애호가입니다. 또한 그녀는 일섬의 레노 NPC를 누구보다 마음에 들어 합니다. 역시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호감도 수치가 100%여도 친밀한 사이는 아니다?


잘 아시다시피 결과는 썩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젤딘 슈나이더와 일섬의 레노는 모험가와 동일 성별일 경우, 친밀 단계에 이르지 못하는 제약이 걸려 있으니까요. 따라서 남성 유저 A와 여성 유저 B는 각각 NPC와 성별이 불일치하는 캐릭터를 따로 육성하여 새롭게 호감도를 쌓아야만 합니다. 정작 자신만의 No.1 캐릭터가 이미 있는데도 말입니다. 


동성끼리는 친밀하면 안 돼?

이를 두고 아마 일부 독자께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친밀 단계 대사 중에는 연애를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 만약 동일 성별 제약이 없다면 캐릭터와 NPC 간의 동성애를 묘사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해당 NPC 설정과 맞지 않는 오류가 일어나지 않느냐. 대충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네요. 이와 같은 예상 비판에 미리 답변하자면 “지당한 말씀입니다”. 

 

NPC마다 엄연히 제작자가 부여한 고유 설정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성 귀검사라면 데 로스 제국 산하에 있는 NPC와는 친근하게 지낼 수 없는 것처럼요.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그것이 무너지는 일이 빈번히 벌어진다면? 달가워하는 모험가는 거의 없지 않을까 합니다. 가령 엘븐가드에 있는 대장장이 라이너스 아저씨는 이성애자인데 유저의 플레이에 의해 동성애자(혹은 양성애자)가 될 수도 있다면 그야말로 아라드에는 대혼란(?)이 일어나겠지요.

 


그러나 이 단락에서 먼저 풀고자 하는 이야기의 행방은 연애와 좀 거리가 멉니다. 친밀하다고 곧장 연애로 뛰어드는 과감한 투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거니와, 세상 모두가 친밀함과 애정을 동등하게 간주하는 것도 아니라고 믿거든요. 달리 말하면, 친밀함이라는 감정을 이성이나 동성에게 제각기 달리 표현할 수도 있을 법한데 아라드에서는 여태껏 그게 허용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호감과 친밀이라는 단계적 분류 말고, 동일한 친밀 단계에서 각자 얻어가는 텍스트만 다르게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앞서 예시로 든 젤딘 슈나이더의 친밀 단계 대사 중 하나를 발췌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전략) … 그, 그러니까 모험가님은… 어, 어떤 여성상을 좋아하십니까? 

…(중략)… 

흠흠, 그럼 다음 질문으로… 지금까지 연애 경험은 얼마나 되십니까? 

[출처: 나무위키]


젤딘 슈나이더가 이성애자라는 전제하에, 위의 대사를 미루어보건대 듬직하고 멋진 남성 모험가에게 애정을 느끼는 수줍은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데 만약 모든 NPC가 캐릭터 성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친밀 단계에 다다를 수 있다면? 연애를 직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대사 없이도 더욱 긴밀한 사이를 연출할 수 있다면? 동성 모험가를 향한 젤딘 슈나이더의 친밀한 대사를 다음과 같이 꾸밀 수도 있지 않을까요? 


모, 모험가님… 같은 여자로서 긴히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모험가님처럼 강하게, 그것도 아름다움을 항시 겸비한 채로 

강한 실력자가 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제게 귀띔이라도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모험가님을 지켜볼 때마다 마치 전장에서 자유로이 춤추는 수려한 꽃잎과도 같다고 느꼈습니다. 

군인이라고는 해도 한편으로는 여자이기도 한 몸인지라 모험가님 같은 분을 언제나 롤모델로… 

아, 죄, 죄송합니다. 위급한 상황인데 제가 감히 바쁜 모험가님을 붙잡고 무슨 말을 꺼내는 것인지… 

네? 아무렴 어떠냐고요? 과, 과연 모험가님은 아량이 참 넓으시네요. 

후후후, 이러니 동경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 가볍게 작성한 거라 젤딘 슈나이더의 고유 성격과 맞지 않을 수 있으니 그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떤 캐릭터를 플레이하느냐에 따라서 관계의 끝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자칫 게임 내 재미 요소를 반감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반면, 무슨 캐릭터를 고르든 NPC와의 인연을 제한 없이 다져나갈 수 있을 시에는 기존보다 더 깨알 같은 즐거움을 선사해주겠지요. 캐릭터 고유 스토리에 의한 악연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요.

 

 


또 하나의 ‘if’

슬슬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하던 찰나, 다른 관점에서 한 번 더 문제를 논하며 글을 마쳐도 좋으리라는 아이디어가 번쩍였습니다. 이에 별개의 열린 가능성― 동성을 향한 연애 대사 처리도 이성만큼이나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 을 하나 더 제안하고자 합니다

 

분명 앞서 친밀 단계를 성별마다 구분 짓지 않을 경우, NPC 기존 설정과의 충돌을 문제 삼은 견해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친밀 단계에서 동성에게 연애 목적의 대사를 날리는 것은 곤란할 수 있다는 취지로 글을 전개했었지요. 

하지만 때로는 넘쳐나는 자유도를 플레이어에게 주는 게 순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난감하면서도 재미있는 상황 연출이 금세 떠오르지 않나요? 예를 하나 꼽자면, 남성 프리스트에게 기존 설정에는 (아마도) 없을 동성애 요소를 도입하여 일명 ‘게이룩’을 입히고 모험가들끼리 희화화하는 광경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요. 게이룩은 네오플 매출에 부분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무작정 안 된다고 하기는 뭐한 물건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캐릭터와 NPC 사이에 모험가가 개입하여 새로운 서사를 자아내는 일이 가능할 겁니다. 발상을 뒤집어, 친밀 단계를 연애 과정으로 인정하되 동성에게도 연애 관련 대사를 출력하는 거지요. 이러면 라이너스 아저씨가 정말 일부 모험가에게는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로 비칠 수 있겠지요. 젤딘 슈나이더도 그렇고요. 이에 손사래 친다거나 별 반응이 없거나, 아니면 격하게 환영하는 등 각양각색의 피드백이 쏟아지는 가운데, 모험가마다 캐릭터와 NPC의 관계를 천차만별로 재정립해나갈 겁니다. 공식 설정이 아닌 어디까지나 ‘if’인 범위 내에서요. 중요하니까 다시 한 번 강조! 설정 파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오리지널 스토리에 하등 영향을 끼칠 수 없는 if일 뿐입니다. 

 

 

이렇듯 NPC와의 친밀한 관계는 정녕 어디부터 어디까지이며, 어느 선에서 허용할 수 있는지 등 고민할 거리는 한둘이 아닌 모양입니다. 개발팀에서 이를 얼마나 반영해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곰곰이 호감도 시스템을 이참에 여러분도 고찰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여러분이 설계한 호감도 시스템이 어느 날 문득 아라드에 등장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