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적의 일입니다. 당시 학과 휴게실에서 노트북으로 던전앤파이터(이하 '던파')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캐릭터를 육성하고 있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그 날 나눴던 대화는 얼핏 기억합니다. 제 대화 상대는 동아프리카 국가 중 하나인 에티오피아에서 온 교환학생이었습니다. 그는 흑인이었지요.
노트북으로 2D 게임을 하는 게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제 쪽으로 오더니 스크린을 한참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이 게임 재미있냐? 한국에서 유명한 게임이냐? 같은 소소한 질문을 했습니다. 차례차례 답변하던 제게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이 게임에는 흑인 캐릭터가 있어?"
흑요정은 있어도 흑인은 없는 아라드
그 날 질문을 받았던 때로부터 지금까지도 아라드에 흑인 캐릭터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귀검사나 거너처럼 플레이어가 직접 컨트롤할 수 있는 캐릭터든, 항시 지정된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NPC든 아바타나 이벤트로 피부색이 바뀌는 예외 사항을 제외하면 공식적인 흑인 캐릭터가 매우 드물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거의'나 '드물다'는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흑인 캐릭터가 아예 전무하지는 않았거든요.
지금은 사라진 <사망의 탑> 30층의 크루세이더 NPC였던 '잔소리 유고'. 도트와 일러스트를 보고 우리는 그를 흑인이라 인식했던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고처럼, 설정 자체가 흑인이라 할 만한 캐릭터가 아라드, 심지어 마계에 얼마나 있나요? 열심히 머리를 굴려도 도통 떠오르지 않습니다. 설정 측면에서 같은 흑(黑) 자가 들어가는 흑요정이 그나마 가깝다고 하기에도 좀 무리입니다. 카곤, 샤란, 메이아 여왕, 장로 사프론, 하이모어, 알리샤 아덴 등 대표적인 흑요정 NPC를 향해 흑인이라고 지칭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흑인의 이미지는 좀 더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입술이 두터운 편이 아닐까 하거든요.
스스로 피부 아바타를 바꿔입지 않는 한, 아라드 모험가에게 흑인은 꽤 낯선 존재입니다. 유고의 존재 사항으로 추정하자면 아라드 어딘가에 흑인이라 부를 만한 이들이 거주하는 듯도 한데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합니다. 대개 우리에게 익숙한 황색 인종, 이보다 더 살결이 흰 인물들, 혹은 다크나이트나 사도 오즈마처럼 판타지 세계에서나 볼 법한 이도저도 아닌 피부의 캐릭터가 있었을지언정 흑인은 매우 희귀했고, 이 글을 쓰는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흑인이 아라드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
이쯤 읽은 독자 여러분은 제가 이어서 할 주장이 아마 다음과 같다고 예측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라드에 흑인 캐릭터 비중을 늘려야 한다, 라고요. 실제로 글로벌을 지향하는 던파라면 더더욱 골고루 다양한 인종을 등장시키는 게 현지화 사업 등 여러 모로 더 괜찮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글에서 흑인 캐릭터가 던파에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설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주장을 펼치기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참 많으며, 저는 현재와 변함없는 상태라면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서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 제가 인종차별주의자라거나 흑인에 무슨 악감정이 있느냐 같은 오해는 하지 말아주시라. 지금부터 그 이유를 말씀드릴테니까요.
아라드에 우리가 흔히 흑인으로 간주하는 캐릭터의 비중이 적은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이에 반하여 흑인이 조연, 더 나아가 주연으로 활약하는 문화예술 작품은 해마다 풍성해지고 있는 게 국제적인 추세이죠. 영화계 흥행몰이의 선두주자인 MARVEL의 <어벤져스>만 보더라도 흑인 영웅이 등장해 화끈한 영상미를 선사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미국 뉴욕 빈민가의 흑인들로부터 탄생하다시피 한 힙합은 국내에서도 널리 사랑받는 음악 장르로 자리를 굳히기도 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흑인을 다룬 기존의 문화예술 작품과 던파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게 과연 타당한 일일까요? 현실 세계를 모티브로 삼은 여타 문화예술과 태생부터 판타지에 기반을 둔 던파를 동등한 선에 두고 왈가왈부하는 게 논리적으로 마땅할까요?
우선 현실 세계의 인종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인종을 나누는 갈래는 보통 세 가지- 니그로이드(흑인) ·몽골로이드(황색인) ·코카소이드(백인) -입니다. 그렇지만 흑, 황, 백처럼 학계에서는 단순한 피부색만으로 인종을 지정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두형, 모발 등 분류표에 입각한 기준을 바탕으로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정의내리곤 합니다. 일례로 살결이 비교적 검은 인도인을 백인으로 구분하기도 하지요. 다른 인종 간의 2세 자녀를 어떤 인종으로 구분해야 할지 피부로만 봐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기도 하다는 게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입니다. 과거에 비해 점점 국제 이주 및 결혼이 활발히 되는 오늘날, 인종 연구는 더더욱 어려운 경향을 보이고 있답니다.
사실 오늘날 인종은 생물학적인 의미보다 정치적인 뜻으로 많이 쓰이는 용어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문제시되는 인종 차별은 여전히 매우 민감한 화두인데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가 중국에서 작년 가을 만만치 않은 곤혹을 치른지 엊그제 같은데, 독일의 DIY 기업 호른바흐(HORNBACH)가 아시아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광고로 최근 이슈가 되었습니다. 피부색이나 두형 같은 인종적 특징만 보고 '이 사람은 ~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무시 못할 결과를 안겨준 셈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크게 세 갈래로 구별되는 인종 사회에서 살고 있기에 일어나는 일들이죠.
반면, 아라드의 인종 분포도는 과연 어떠한지 모험가 그 누구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반투족과 마계인이 각각 어느 인종에 속할지 아시나요? 하물며 행성, 차원이 다른 존재가 드나드는 판국에 각양각색의 피부를 지닌 캐릭터는 수도 없을 것이며 인종은 또 얼마나 무궁무진할지 감을 잡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테지요. 현실 세계의 잣대로 인종 비율을 논하기에는 아라드가 지닌 가능성이 너무나도 겉잡을 수 없는 크기입니다.
어쩌면 아라드에 현실의 분류표를 도입할 시 흑인이라 부를 만한 캐릭터가 이미 상당수 있을지 모릅니다. 인종은 피부색으로 성급하게 구분할 수 없는 탓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의미하는 흑인은 우리의 일반화된 고정 관념 속에 있는 이들이라 간주하고 있으므로, 자칫 논점을 흐릴 불필요한 전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저 아라드의 인종 분포도를 논문처럼 정리, 분석한 모험가나 공식 설정이 등장하기를 학수고대할 뿐입니다.
흑인 캐릭터의 비중이 무척 적은 게 아쉬울 수야 있습니다. 흑인의 주거 구역으로 유명한 뉴욕 '할렘'을 모티브로 삼기까지 했으면서 흑인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 충분히 할 수 있지요. 저 역시 이에 공감하며 추후라도 매력 넘치는 흑인이 아라드나 마계에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장 무턱대고 등장하지는 않길 바랍니다. 던파에 흑인이 꼭 있어야 할 당위성은 엄밀히 따지자면 사실상 없기도 하거니와, 설사 반영한다 하더라도 앞서 언급했다시피 선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향후 나올지도 모를 흑인 신캐를 위하여
과거 <사망의 탑>의 유고와 같이, 어느 날 갑자기 자연스럽게 흑인 캐릭터가 아라드에 등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NPC가 아닌 신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흑인이 출시된다고 하면 여론이 어떨까요? 신선, 참신하다는 의견도 있을 테지만 부정적 여론도 없잖아 형성될 거라 예상합니다. 단순한 가정이긴 합니다만 언젠가 나올지도 모를 흑인 신캐를 꺼려하는 이들은 인종주의자라서 그런 것일까요(극히 드물게 그럴 수야 있지만, 인종 차별이 옳지 않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의를 사랑하는 모험가라면요)?
물론 아닙니다. 만약 흑인의 아라드 데뷔를 거부하는 이가 진정 있다면, 그 또한 던파를 진심으로 아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흑인이 나올 낌새나 단서가 세계관 내에서 매우 희박했다는 전제 하에서요. 이와 관련하여 던파는 꽤 쓰라린 흑역사를 하나 보유하고 있지요.
흔히 '설정 충돌'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나이트 출시 이후로 많이 부각되곤 했었습니다. 부정적 여론을 진화시키기 위해 이후 운영진이 진땀을 뺀 바 있었고, 이를 교훈 삼아 향후 등장하는 신캐는 티저 사이트부터 공을 들여 모험가가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두는 편입니다. 그러므로 플레이어블 흑인 캐릭터 역시 출시 이전부터 아라드 세계간에 잘 녹아들 수 있게끔 갖은 안전장치가 뒤따르리라 믿습니다. 정말 나올지는 미지수지만…
결국 유저와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는 원론적인 종착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솔직히 참 '당연한' 이야기라 굳이 이렇게 길게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는 사안입니다. 그럼에도 의외로 공감대 마련에 실패하여 비판을 받은 게임이 종종 기사로 보도되곤 합니다. 밸런스 패치와 같은 게임사의 영원한 숙명이자 고질적인 영역이 아닌, 설정 부분을 잘못 건드렸다가 상당수 유저를 등지게 만든 사례가 이에 속하는데요.
AOS 장르의 명작인 <리그 오브 레전드>는 수많은 캐릭터 만큼이나 여러 차례 설정을 고쳐온 바 있습니다. 갈리오, 문도 박사, 우르곳 등 일일이 나열하기가 입 아플 정도죠. 그런데 유독 설정 리메이크로 논란을 키운 캐릭터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루스입니다.
관련 소식을 일찍이 접한 독자께서는 잘 아실 테지만, 바루스의 리메이크로 논쟁이 심화된 가장 큰 원인은 동성애 설정 삽입입니다. 기존에는 없었던 설정이 부각된 점이야 여타 캐릭터의 리메이크와 별 차이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비판하는 유저 모두가 동성애를 끔찍히도 싫어하는 호모포비아(homophobia)이기 때문에 부정적 여론이 나타난 것일까요? 개중에 호모포비아가 있을 수 있어도 그보다 더 본질적인 핵심은 동성애 혐오가 아니리라 믿습니다. 던파에 흑인 신캐가 아무런 사전적 배경 없이 나왔을 시, 이를 비판하는 모험가가 모두 인종주의자가 아니듯이. 원래 바루스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는 배경으로 미루어 볼 때 그를 이성애자(혹은 양성애자)라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싹 뒤엎고 동성애적 요소만을 부각시켜 유저로 하여금 당혹감과 배신감을 안겨줬기에 문제가 커진 게 아닐까 합니다.
사실 비단 게임계에 국한되는 일은 아니며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성소수자나 여성, 흑인 등 그동안 사회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게 트렌드입니다. 다문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성별, 성적 지향, 인종, 학력 등 여타 기준에 따라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이 더욱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상업용 게임을 일종의 정치 도구로 활용하는 경향에 관하여 비판하는 게이머가 적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자신이 아끼던 캐릭터가 어느 날 갑자기 사전 예고도 없이 180º 변한다고 상상해보세요. 알고 봤더니 프리스트(남)이 게이였다더라, 같은 설정이 갑자기 도입된다면? 동성애자가 문제가 아니라 공감대 형성을 위한 노력을 여실히 기울이지 않은 채, 유저와의 신뢰를 저버린 개발사로 비난의 화살이 꽂힐 것입니다.
게임의 구조 및 설정을 바꾸는 작업은 사용자의 입장이나 경험을 신중히 이해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선행 단계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지요. 지난 4월 11일, 아라드 내에서 일련의 경제 부문 개선 패치가 있었습니다. 마법부여 아이템의 교환 횟수 제한도 이 중 하나입니다. 이 같은 업데이트는 운영진의 독단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다수 모험가의 편의를 고려한 개선 사항이었고, 실제로 호응도 나쁘지 않습니다.
글을 마치며
아라드에 흑인 캐릭터가 거의 전무한 실정을 논하려다 어째 좀 먼 길을 돌아온 기분입니다. 긴 글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상업용 게임 내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부합하는 시도를 정녕 원한다면, 사전에 충분히 유저의 호응을 이끌 수 있는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어야 한다' 쯤이 되겠지요. 사족이지만 '상업용'임을 강조하는 까닭은 애초부터 정치적 올바름이 기획 의도 중 하나인 기능성 게임(Serious game)이란 녀석도 있어서입니다. 이 둘은 게임 카테고리에 함께 있긴 하나 엄연히 다른 영역이기에 각각 접근해야 할 방식과 이론에도 차이가 있지요. 그 옛날 던파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네오플의 콘텐츠 중 하나였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운동에 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애초에 기획 방향성 자체가 다르기에, 상업용 게임이 차별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거쳐야 할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라드에 흑인 캐릭터가 데뷔하는 게 반가울 거 같으면서 걱정부터 앞서기도 합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염려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만약, 정말로 언젠가 등장하다면… 그 때는 모두에게 환영받는 신캐이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끝으로 에티오피아 교환학생에게 흑인 캐릭터는 없다는 답변을 한 후, 제가 들었던 말은―
"Okay. See you."
P.S
참고 문헌 및 본문에 삽입한 일러스트의 출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던파 공식 홈페이지는 출처 소개에서 제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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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놓은 던파 APC 일러스트
잔소리 유고헤드샷 바티스타 눈보라의 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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